2026. 6. 5. 14:35ㆍ아티클 | Article/Issue1. 특별기고
1. 개별 건물 중심 정책의 성과와 한계
2013년 「녹색건축물 조성 지원법」제정 이후, 우리나라 건물 부문의 탄소중립 정책은 단열 성능 강화, 태양광 보급, 제로에너지건축물(ZEB) 확산 등 개별 건축물의 효율 향상과 재생전력 확대에 주로 집중해 왔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탄소중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굳건한 토대이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복잡한 대도시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건물 하나하나의 성능 개선만으로는 탄소중립을 완성하기 어렵다. 도시 차원의 전력·열에너지망과 개별 건축물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실질적인 탄소중립이 가능해진다.
서울과 부산 등 우리나라의 주요 대도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고밀·고층 도시다. 인구와 건물이 과도하게 밀집된 탓에 옥상의 가용 면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인접 건물로 인한 일조권 차폐가 심해 현장 태양광과 같은 대지 내(On-site) 재생에너지 발전 잠재량이 구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도시 공간의 노후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국토교통부 2024년도 전국 건축물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사용승인 후 30년 이상 경과한 노후 건축물의 비율이 동수 기준 44.4%에 달한다.
이런 조건에서는 각 건물이 단열을 강화하고 태양광 설비를 늘려 스스로 에너지 자립률을 높이도록 유도하는 기존의 ‘점(點)’ 단위 접근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기존 노후 다가구 및 공동주택의 난방·급탕 시스템을 가스보일러에서 개별 전기식 히트펌프로 전환하는 ‘전면 전기화’ 방식 역시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힌다. 좁은 발코

니 내 실외기 설치 공간 부족, 설비 하중 및 소음 문제, 수전 용량의 한계 등 수많은 물리적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단열 성능이 떨어지는 노후 건물은 60℃ 이상의 고온 난방이 필수적이어서, 저온 구동 히트펌프 단일 기기의 일괄 보급만으로는 그 난방 수요를 온전히 감당하기 어렵다.
2. 청정열 기반의 열에너지망 : 도시를 연결하는 새로운 탈탄소 경로
이제는 개별 건축물의 성능 향상에 머무르지 않고, 도심의 열 망과 건축물을 함께 설계하는 방향으로 도시계획과 건축설계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특히 건물의 연식, 단열 수준, 요구 난방온도에 따라 지역난방과 히트펌프를 유연하게 조합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도심 곳곳에서 버려지고 있는 미활용열을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데이터센터 폐열, 하수열, 소각열, 인근 산업단지 폐열 등은 지금까지 도시 안에서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지만, 적절한 열 망과 결합될 경우 건물 부문의 탈탄소를 이끄는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청정열 기반 지역냉·난방망은 화석연료 연소에 의존하지 않고, 폐열과 재생열을 주요 열원으로 활용하는 4·5세대 저온 열에너지망을 뜻한다. 개별 건축물은 양방향 열교환기(Substa\-tion)를 통해 외부 열에너지망과 연결되고, 필요한 경우 건물 내 히트펌프를 통해 요구 온도까지 올려 난방과 급탕에 활용할 수 있다.

이 방식은 도시 차원의 열원과 건물 내부 설비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건물마다 다른 조건에 맞는 유연한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탄소중립 도시는 건물의 고립된 자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도시 전체의 에너지 흐름을 어떻게 연결하고 조정하느냐가 대도시 탈탄소의 핵심이 된다.
3. EU EPBD 2024 : ‘제로에너지’에서 ‘제로에미션’로의 정책 전환
이 지점에서 유럽연합(EU)의 최근 변화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EU는 전면 개정된 건물에너지성능지침(EPBD 2024)을 통해 건물의 궁극적 목표를 ‘제로 에너지 빌딩(ZEB)’에서 ‘제로 배출 빌딩(Zero-Emission Building)’으로 격상시켰다.
이는 단순히 에너지를 적게 쓰는 건물을 넘어, 현장에서의 화석연료 연소가 일절 없고 건축물 운영 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사실상 제로화하는 건물을 지향하겠다는 뜻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고밀도 도심 환경에서 건물마다 대지 내(On-site) 자립만을 요구하는 방식의 물리적 한계를 제도적으로 명확히 인정했다는 점이다. EU는 신축 건물(2030년)뿐만 아니라 기존 건물(2050년)까지 단계적으로 제로 배출 체계로 전환하도록 못 박았으며, 대지 외(Off-site)에서 조달하는 청정열 기반 지역 냉·난방망 연계나 외부 재생에너지 사용을 탈탄소 달성의 핵심 경로로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또한 에너지 성능이 낮은 기축 건물의 개선을 강제하는 최소에너지성능기준(MEPS)을 도입하여, 도시 차원의 탈탄소 열망(인프라)과 건축물의 연계가 규제와 금융의 틀 안에서 제도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설계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및 설비 보급을 넘어, 도시 인프라와 건축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생태계로 바라보는 정책 철학의 대전환이다.
왜 이런 전환이 이 시대에 중요한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도시의 직접배출을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건물은 지하 보일러실에서 가스를 직접 태워 난방과 급탕을 해결해 왔다. 탄소중립 도시는 건물 현장에서 화석연료를 연소하는 방식부터 줄여야 한다. 건물 내부의 직접배출을 낮추고, 외부에서 청정하게 생산된 전기와 열을 공급받는 체계로 전환해야 비로소 도시 전체의 온실가스를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둘째, 도시는 이미 충분한 열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 폐열, 하수열, 소각열, 산업단지 폐열처럼 지금도 많은 열이 도심에서 버려지고 있다. 문제는 열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를 회수하고 연결할 시스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셋째, 탈탄소 열망은 전력망의 불안정성을 보완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가 확대될수록 전력계통은 변동성과 잉여전력 문제를 함께 안게 된다. 이때 도시의 열망은 P2H(Power to Heat)를 통해 거대한 열저장장치처럼 작동할 수 있다. 전력과 열을 따로 보지 말고 함께 연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정부·도시계획가·건축사의 역할 재정립 : 에너지 효율에서 배출량 검증으로
우리나라의 건물부문 탈탄소 정책은 지금까지 히트펌프, 단열, 태양광, 제로에너지건축물 확산을 통해 중요한 토대를 다져 왔다. 이 방향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다만 이제는 설비가 얼마나 보급되었는지, 단열재가 얼마나 두꺼워졌는지를 확인하는 단계를 넘어, 그 결과 도시 현장의 화석연료 직접배출이 실제로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를 검증하는 제도가 병행되어야 한다. ‘에너지 효율 중심’의 정책을 유지하되, 이를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중심’의 정책 체계로 확장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 정부, 도시계획가, 건축사의 역할도 보다 분명해져야 한다. 정부는 정밀한 열지도 구축, 열수요지구 지정, MRV(측정·보고·검증) 기반의 성과 검증 체계를 통해 데이터와 제도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MRV 체계란 건물의 총 에너지 소비량과 신재생에너지 생산량을 명확히 분리하여 계측하고, 실질적인 탄소 감축 성과를 지자체·금융기관·사업자가 동일한 기준으로 투명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 표준 인증 시스을 말한다. 도시계획가는 열지도 기반 조닝, 에너지 전용 용지 확보, 입체적 공간 활용, 미활용열 연계 조건 설정을 통해 그 기반을 실제 도시 공간으로 구현해야 한다. 건축사는 이렇게 도시계획으로 마련된 거시적 ‘선(인프라)’을 개별 건물이라는 ‘점’에 최적화하여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건물의 용도와 형태에 맞춰 양방향 열교환기나 히트펌프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설계하고, 외부 열망과의 연계 효율을 극대화하는 공간적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정부가 제도의 틀을 만들고, 도시계획이 에너지 흐름의 공간을 설계하며, 건축이 이를 실현할 때 비로소 도시는 건물의 집합을 넘어 살아 있는 에너지 생태계로 전환될 수 있다.

5. 이미 시작된 변화 : 미활용열 공론화에서 국가 열에너지 혁신전략으로
다행히 이러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한국도시계획가협회는 2024년 10월 31일 국회에서 개최한 ‘미활용열 대토론회’를 통해 철강공장 및 원전의 폐열을 이용한 주거지 난방 공급 방안, 산업단지 폐열을 활용한 발전 혁신기술, 유럽의 선도적인 열에너지 활용 사례 등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는 그동안 버려지던 잉여열이 도시 탄소 감축과 에너지 자립을 위한 핵심 인프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성공적으로 공론화한 변곡점이었다.
최근의 정부 움직임은 더욱 고무적이다. 2026년 4월, 기후에너지환경부에 신설된 ‘열산업혁신과’ 주도로 범부처 차원의「열에너지 혁신전략」 이 발표되었다.
이 전략은 ‘열에너지 혁신으로 실현하는 탈탄소화·전기화 대전환’이라는 비전 아래, 일정 규모 이상 건축물에 대한 청정열 공급·사용 의무화(CHO), 전국 5대 권역별 광역 열네트워크(국가 열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열거래 플랫폼 및 MRV 인증 체계 마련 등 중장기적인 전략까지 담고 있다.
이는 미활용열이 단순한 기술적 자원을 넘어 도시 차원의 핵심 에너지 인프라로 완전히 격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정책과 도시계획 그리고 건축이 함께 움직일 때 탄소중립의 변화는 비로소 도시 안에서 실현이 된다.

이명주 / mylovezed@gmail.com
명지대학교 건축학전공 교수, 한국 건축사·독일건축사
한국도시계획가협회 도시미래경쟁력분과장
도시에너지위원회 위원장
기후변화정책전공 행정학박사로서 건축·에너지·정책을 아우르는 통합 연구와 실무를 수행해 왔다.
녹색성장위원회 총괄기획분과위원장(2020~2021), 2050 대통령직속 탄소중립위원회 녹색생활분과위원장(2021~2022)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세종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 위원(2024~현재 )으로 공공 프로젝트의 품질 향상과 탄소중립 이행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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