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5. 10:45ㆍ아티클 | Article/Issue2. 국내 도시 이슈
구미 도시생활권 발전의 좌표와 가능성
생활권 계획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시설을 공급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시민의 삶에 촘촘히 닿느냐’에 있다.
구미의 질문은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인구 감소, 산업 재편, 신공항 개항이라는 복합 전환기 앞에서 구미는 도시기본계획과 도시관리계획 사이의 공백을 채울 새로운 공간 언어를 요청받고 있다.
1. 생활권 계획이란 무엇인가 - 도시계획의 ‘마지막 1킬로미터’
도시계획에는 오래된 역설이 있다. 도시기본계획은 20~30년을 내다보며 도시 전체의 큰 그림을 그리지만, 정작 시민이 매일 발을 딛는 골목, 경로당, 작은 도서관, 마을 버스 정류장은 그 그림 어디에도 선명하게 담기지 않는다. 반면 도시관리계획과 지구단위계획은 3~30헥타르의 좁은 구역을 정밀하게 다루지만, 그 구역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하나의 일상을 이루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생활권 계획은 바로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등장했다.
생활권(生活圈)은 시민이 통근·통학·쇼핑·여가·친교·공공서비스 등 일상의 필요를 해결하는 실제 공간 단위다. 행정 경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권역이며, 규모로는 보행 10~30분, 대략 행정구나 읍면 단위에 해당한다. 이 단위에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도시를 제도와 면적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로 다시 읽는 일이다.
등장 배경 - 인구구조 변화와 15분 도시 담론
생활권 계획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여러 갈래다. 하나는 인구구조의 변화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진행되면서 ‘멀리 있는 큰 시설’ 대신 ‘가까이 있는 작은 서비스’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동이 어려운 고령자,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 대중교통에 의존하는 청년 1인 가구 모두가 일상의 반경 안에서 삶의 질을 결정짓는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하나는 ‘15분 도시(15-minute city)’로 대표되는 국제적 도시 담론의 확산이다. 프랑스 파리는 2020년 시장 선거에서 출마자가 15분 도시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주목받았고, 이후 바르셀로나의 슈퍼블록(Superblock), 포틀랜드의 완전한 이웃(Complete Neigh\-bourhoods) 등 유사한 개념이 전 세계 도시로 번졌다. 이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하나다. 차량 중심, 외곽 집중, 기능 분리로 설계된 도시를 보행 중심, 근거리, 복합 기능의 도시로 재편하자는 것이다.

국내 흐름 - 서울에서 중소도시로
국내에서는 2014년 서울시가 ‘2030 서울 생활권 계획’을 수립하면서 생활권 계획이 제도적 논의의 전면에 등장했다. 서울시는 도시를 5개 권역생활권과 116개 지역생활권으로 나누고, 일자리․주거․교통 등 7개 이슈를 중심으로 장기간 상향식(Bottom-up) 방식으로 계획을 수립했다. 부산시는 파리 모델을 채택해 ‘15분 도시 부산’을 표방하며 62개 보행생활권을 설정하고 시범사업(해피챌린지)을 추진했다. 전주 제주 천안 등 중소도시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생활권 계획을 제도화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생활권 계획은 만능이 아니다. 생활권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경계 문제는 늘 논란이 된다. 계획이 행정 주도로만 진행될 때 주민의 실제 생활 패턴과 어긋날 수 있으며, 소생활권 단위로 시설을 배분하다 보면 도시 전체의 연계성이 희생되기도 한다. 계획이 아무리 정교해도 재원과 추진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문서로만 남는다. 이 맥락에서 구미의 실험은 주목할 만하다.
구미의 현실 - 다섯 가지 구조적 과제
구미는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경북 최대의 공업도시다. 1970년대 국가산업단지 조성 이후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심장부로 기능해 왔지만, 지금 구미는 낯선 질문들과 마주하고 있다.
도심 일부 동의 인구는 최근 10년 새 6~9%가 줄었고, 고령인구 비율은 13%대에서 19% 수준으로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국가산단은 노후화되고 있으며, 원도심 상권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동시에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이라는 거대한 변수가 도시 동쪽을 새롭게 재편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 전환의 국면에서 경북연구원은 구미시의 의뢰로 『구미 도시생활권 발전방안 연구』를 수행 중에 있다. 연구원이 진단한 구미의 도시 문제는 다섯 축으로 수렴된다.


첫째는 생활권 간 인구 이동의 양극화다. 신공항 인접 산동읍이 16.2%의 인구 증가를 보이는 동안 여가와 농촌 생활권의 인구는 10년간 12~13%가 감소했다. 북부 농촌 3개 면의 고령화지수는 시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둘째는 국가산단의 노후화와 기업 이전에 따른 산업 클러스터의 재편이다. 셋째는 대경선 광역철도와 신공항 연계 철도 건설이 만들어내는 공간 구조의 근본적 변화다. 넷째는 옥성, 도개면 등 일부 지역의 지방소멸 위기다. 다섯째는 생활 SOC의 공간적 불균형이다. 구미시 필요 생활 SOC 169개 중 27개가 미충족 상태이며, 일반병원 충족률은 45%, 문화시설 충족률은 50%에 그친다. 2025년 현장 소통 시장실 ‘온(溫)데이’ 건의사항 252건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시민이 가장 절실하게 호소한 것은 의료·돌봄·문화 인프라의 불균형 해소였다.
구미형 생활권 체계의 설계- 4대 중심생활권, 12개 소생활권
경북연구원은 국내외 생활권 계획 사례를 검토하여 구미에 최적화된 체계를 설계했다. 핵심 쟁점은 ‘몇 단계 위계로 생활권을 구성할 것인가’였다.
전주·제주·천안이 채택한 3단계(대-중-소)와 일본의 향토집락 생활권 모델이 적용한 4단계를 비교 검토한 결과, 연구원은 3단계 체계(시 전역-생활권-소생활권)를 선택했다. 인구 40만 명 수준의 중소도시에 4단계 체계는 관리 복잡성과 위계 간 경계 설정의 어려움을 초래하며, 도심(동지역) 중심에 농촌(읍면)이 보완되는 구미의 공간 구조에는 3단계가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이 연구가 생활권 계획의 통상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지점이 있다. 기존 생활권 계획의 상당수가 행정 경계에 맞춰 권역을 정한 뒤 시설 수요를 역산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연구는 시민의 실제 생활 패턴과 현안 수요를 먼저 파악하고 그에 맞춰 권역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
SGIS(통계지리정보서비스), KOSIS(국가통계포털) 인구이동통계, 시민 건의사항 분석, 구미시 실무진 워크숍 등을 병행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결과 도출된 4개 중심생활권과 12개 소생활권은 각기 다른 성격과 목표를 갖는다. 강남권 14개 동(20만 명)의 도심 중심 생활권은 구도심 재창조와 스마트시티 전환을 목표로 한다. 신공항에 인접한 강동권 1읍 2면 3동(14.6만 명)의 신공항 중심 생활권은 공항경제권 조성과 글로벌 산업·물류 거점화를 지향한다. 낙동강 수계와 산림을 품은 강북권 3개 면(0.5만 명)의 여가 중심 생활권은 생태관광과 웰니스 거점으로, 강서권 2개 읍(5.2만 명)의 농촌 중심 생활권은 스마트농업과 도농상생의 복합 정주지로 방향을 잡는다.
12개 소생활권은 각각 고유한 정체성과 발전 목표를 갖는다. 인동·진미 소생활권은 반도체 클러스터와 첨단 R&D 거점으로, 도개 소생활권은 신라불교초전지와 낙동강 수변을 결합한 역사 · 웰니스 관광지로, 양포 소생활권은 신공항 배후 젊은 신도시이자 아이 키우기 좋은 스마트시티로 설정된다. 생활권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삶의 단위여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연구가 고집한 하나의 원칙이었다.
생활 SOC 확충 부족 시설 나열이 아닌 수요 맞춤 공급
이 연구의 또 다른 특징은 생활 SOC 공급방식에 있다. 부족한 시설을 나열하는 단순 배분방식 대신, 수요 분포와 기존 입지를 함께 고려하는 ‘생활권별 수요 대응 입지 구상’을 채택했다. 신설 확장 복합화 기능 연계를 포괄하고, 확정 부지가 아닌 도입 필요 권역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분석에서 몇 가지 주목할 사실이 드러났다. 일반병원 충족률이 45%에 불과하고, 특히 신공항권에는 종합병원이 전무하다. 돌봄 시설 중에서는 아픈아이돌봄센터의 부족이 가장 심각했는데, 이는 산단 맞벌이 부부 비율이 높고 교대 근무가 지배적인 구미의 노동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에 따라 신공항권에는 24시 긴급 돌봄센터와 외국인 근로자 통합지원 캠퍼스가, 농촌 생활권에는 이동형 복지 · 건강 순환 서비스와 선산 자연기반 치유․돌봄 거점이 제안된다.
총 108개의 소생활권별 사업이 발굴되었다. 대표 사업으로는 도심 생활권의 ‘금리단길 청년 특화 거리 조성’, 신공항 생활권의 ‘동구미역세권 에어로 스마트시티 허브’, 여가 생활권의 ‘신라불교초전지 K-명상마을 조성’, 농촌 생활권의 ‘문성 로컬푸드 유통·체험 복합특화지구 조성’ 등이 있다.
사례로 보는 생활권 계획 - 양포 소생활권, ‘삶의 단위’가 설계되는 방식
수요 진단 - 숫자에 담긴 일상의 구조
연구원이 SGIS와 KOSIS 인구이동통계를 분석한 결과, 양포 소생활권은 구미 시내에서 학령인구(7세 미만 영유아 포함)가 가장 많이 집중된 권역으로 나타났다. 학령인구만 1만 4천여 명에 달한다. 동시에 인접한 3·4공단의 영향으로 맞벌이 가구 비율이 60%를 상회하며, 공단 특유의 교대 근무 체계로 인해 야간·심야 돌봄 수요가 구조적으로 높다. 문제는 이 수요를 받쳐줄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아픈아이돌봄센터 충족률은 40%에 그쳤고, 기존 돌봄시설은 이미 수용률 포화 상태다. 공단 교대 근무자가 심야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육아 부담이 여성 근로자에게 집중되고, 이것이 다시 여성 경력 단절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교육 인프라의 공백도 뚜렷하다. 강동권 전체를 통틀어 특수목적고등학교가 전무하다. 국가산단과 금오공과대학교를 끼고 있으면서도 이공계 특화 교육 기반이 없다는 것은 기술 인재가 중학교 졸업 이후 자연스럽게 대구·서울로 유출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문화시설 충족률도 50%에 그쳐 맞벌이 부부가 주말 여가를 위해 도심까지 이동해야 하는 불편이 고착되어 있었다.
계획으로의 전환 - 생활 패턴이 사업이 되는 과정
연구는 이 데이터를 토대로 양포 소생활권의 핵심 발전 방향을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 데이터로 앞서가는 스마트시티’로 설정했다. 선언적 구호처럼 보이지만, 이 방향을 뒷받침하는 사업들은 철저히 생활 패턴에서 출발한다.
24시 긴급돌봄센터 운영 확대는 교대 근무 시간표가 만들어낸 수요의 직접적 응답이다. 야간·휴일 전용 공간 리모델링과 심야 전담 인력 강화를 명시한 것도 낮에 운영하는 일반 돌봄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백을 정확하게 겨냥한 결과다. 구미 이과형 과학 특목고 설립 제안 역시 마찬가지다. 양포동 일원에 산업연계형 과학 특목고 캠퍼스를 조성하고, 금오공대·국가산단 연계 조기연구 트을 운영한다는 구상은 ‘학교가 없어서 떠나는’ 젊은 인재의 이탈 경로를 역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 통합지원 거점 조성도 주목할 만하다. 강동권에는 외국인 7,500명이 집중되어 있고, 도심 가족센터까지 이동하는 데 40분 이상이 소요된다. 이 이동 시간 자체가 서비스 이용을 막는 장벽이다. 연구원은 이를 ‘접근성 불평등’으로 규정하고, 양포동 행정복지센터 인근에 외국인 주민·근로자 통합지원센터를 신설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행정 서비스가 시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 동선 안으로 들어가는 발상의 전환이다.
양포 소생활권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생활권 계획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계획의 출발점은 지도 위의 선이 아니라 사람들의 하루였다. 야간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교대 근무 부모, 학교가 없어 대도시로 떠나야 하는 이공계 청소년, 낯선 나라에서 서비스 접근 자체를 포기하는 외국인 가족. 이들의 생활 패턴을 데이터로 읽고, 그 패턴의 빈틈에 정책을 채워 넣는 것 — 이것이 생활권 계획이 도시기본계획이나 도시관리계획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2040년 양포 소생활권의 목표 인구는 5만 명이다. 그 숫자를 달성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도시 설계에 반영되었다고 느끼는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마치며 - 계획은 도면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완성된다
생활권 계획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지 유행이어서가 아니다. 도시계획이 오랫동안 성장과 확장의 논리에 복무하는 동안 정작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은 뒷전이었다. 생활권 계획은 그 질문을 다시 앞자리에 놓는 시도다. 그리고 성장보다 지속이, 확장보다 질적 전환이 화두가 된 지금, 이 시도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구미의 실험이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도권도 광역시도 아닌 40만 중소 공업도시가 인구 감소와 산업 전환이라는 이중의 압박 속에서 생활권이라는 언어로 도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자 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다만 과제도 분명하다. 민간투자 54.5%라는 재원 구조는 경제 여건에 따라 흔들릴 수 있으며, 12개 소생활권의 사업이 각자의 논리로만 움직이다 보면 도시 전체의 연계가 약화될 수 있다. 무엇보다 생활권 계획은 수립 이후가 진짜 시작이다. 계획이 문서로만 남지 않으려면 시장 직속 전담 조직과 협력 거버넌스의 실질적 작동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주민 참여가 수립 단계를 넘어 실행 전 과정에 내재화되어야 한다. 생활권 계획은 도면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완성된다.
권용석 / kwony@gdi.re.kr
경북연구원 연구위원, 도시계획박사(독일 드레스덴 공대)
도시공간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기후변화 적응, 생태지도화, 생활권 계획, 지역소멸 대응 등을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으며,
지역 기반의 도시․농촌 공간 정책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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